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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문화교류와 긍정적 상호영향 한-아랍 교류 1000년의 역사
오랜 문화교류와 긍정적 상호영향
한-아랍
교류 1000년의 역사
이 희 수(성공회대 석좌교수/ 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
글머리에
한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지 50년이 다가온다. 1973년 삼환기업이 수주한 아울라-바이칸 총연장 164km 고속도로가 그 시발이었다. 그 후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국가들은 한국에게 강인한 근대화의 꿈을 품게 한 시장이었고, 한국경제의 성장을 견인하면서 오늘의
한국 발전이 있게 한 은혜와 축복의 땅이었다. 20여년간 연인원
100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땀과 열정을 쏟아 부은 곳이지만, 그들의 문화나 종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고, 오히려 친근감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팽배하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주변 아랍 이슬람 국가들을 1970-80년대
경제적 이해관계의 파트너로서만 바라보는 단견을 넘어서서 한국과 1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적 접촉과
문화적 교류를 해온 오랜 친구로 바라보는 공부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신라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과 아랍의 고대 접촉과 중세 교류 등을 밝혀 지구촌 누구보다 친근한 이웃이고 협력자였던 잃어버린 아랍세계와의 소중한 인연을
되살리기 위해 준비되었다.
1. 개요
한국문화의 깊숙한 기층에는 여러 문화가 중첩되어 있다. 아주 먼 시기부터
바다라는 물길을 따라 들어온 다양한 문화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중요한 자극제였다.
가까운 동북아와 중앙아시아는 물론, 지구촌 문명 젖줄의 가장 먼 곳에 있던 아랍과 이슬람의
흔적도 예외 없이 한반도라는 문화 용광로로 흘러들었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발굴되는 다양한 서아시아
교역품 및 양식 기법의 출토, 아랍 인의 신라 진출, 경주
괘릉의 이방인 석상들, 처용의 존재에 관한 새로운 논의 등은 오래전부터 아랍 계통 문화가 한반도로 흘러들어
왔다는 구체적 증거로 연구되어 왔다. 경주 괘릉 앞의 문인 석상은 중앙아시아 위구르 인의 모습을 보이는
데 반해, 무인 석상은 무슬림 군인의 모습을 띤다.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토용의 모습에서도 무슬림 상인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고대 문화 교류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매우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아랍 상인들의 신라 진출이 본격화된 8∼9세기경에는 세계적 대도시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당나라의
수도 장안--신라의 수도 경주 사이에 문화적으로 거의 ‘동시
패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상류 사회 왕족들이
사용하던 장식품이나 공작새 꼬리털, 비취 모, 공예품, 보석류, 여성 소품들과 장신구, 바그다드
일대로부터 전해진 여러 용도의 페르시아 카펫, 모직 말 안장, 카펫
장식품, 아라비아 남부의 유향과 몰약, 옥 빗과 에메랄드
제품, 유리 제품, 금속 수공예품 등이 중국 장안을 거쳐, 혹은 이슬람 상인들과의 직거래를 통해 신라의 수도 경주에까지 활발하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화려하고 진귀한 수입품과 사치품 들은 신라 귀족 사회의 고급 문화를 일구었다. 경주 고분에서 발굴되는 무수한 서아시아계 출토품들과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아랍 상인들의 교역품 목록들이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동시 패션 시대’라 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경주까지 전달되는 고부가의
교역품 수송이 바닷길이나 낙타를 이용한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 8~10개월이면 가능했다는 뜻이다. 교역품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옛 상인들의 열망은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빠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번영을 구가하는 경주 시장에 상인들은 가장 먼저 도착하기 위해 속도 경쟁을 벌였다. 물론 육, 해상 교역 모두 전속력으로 목표 시장을 향해 달리는 경우보다는
중간 기착지에서 교역을 계속하면서 필요한 상품들을 필요한 지역으로 운반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아랍지역의 문화의 한반도 유입에는 육로 못지않게 바닷길이 결정적 통로 역할을 했다. 고대부터 뚫려 있던 바다라는 무한의 가능성을 통해 사람이 왕래하고 기술을 주고받으면서 한반도는 세계적인 변화의
물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었다. 걸프 해에서 출발한 아랍 선단은 6개월 후면 중국 동남부 해안에 도달했다. 아랍인들은 그곳에 정착해
살면서 공동체를 이루었고, 때로는 중국 해안가에서, 또 때로는
인접한 한반도로 직접 내왕했다. 아시아의 끝과 끝은 그때부터 서로 문화를 나누고 친분을 맺은 사이가
되었다.
통일신라 이전까지는 주로 육상의 오아시스 실크로드가 선호된 반면, 8세기부터는
중국 동남부 해안과 한반도 간의 직간접 해상 교역이 더욱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9세기 초 장보고의 해상 세력이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동북아 경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와
아랍 상인들 간의 교류는 중국에서의 간접 교역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장보고 세력이 몰락하고 시장 질서에
교란이 일어난 9세기 중반 이후에는 아랍 상인들이 직접 한반도에 진출했다. 관련 기록이 아랍 사료에 빈번히 등장하고, 구체적인 교류의 흔적이
감지되는 시기와도 맞아떨어진다.
1498년 5월 22일, 바스코 다 가마는 오만 출신의 아랍 인 항해사 아흐마드 빈
마지드를 앞세워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부 캘리컷에 도착했다. 그에 앞서 1492년에는 인도를 향해 출발한 콜럼버스가 항해술 미숙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면서 유럽 인들의 화려한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유럽이 중세의 긴 암흑 터널에서 깨어나는 역사적 전환점이 마련된 셈이다. 그러나 소위 지리상의 대발견과 대항해시대는 어디까지나 유럽 인들에게 국한된 지극히 서구 중심적인 생각이고 역사
인식이다. 그들이 천동설과 지동설 논쟁에 목숨을 걸고 있을 때,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에 두고 아라비아와 중국 동남부 사이에는 일찍부터 바닷길이 열려 있었고 한반도까지 손쉽게 오갈 수 있었다. 아랍인 항해사들은 항해 기술과 계절풍을 이용하여 내해처럼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을 가로질렀다.
2.
중국을 통한 한국과 아랍의 교류와 접촉
중국 자료에 의하면, 이미 3∼4세기경
중국의 거대한 정크선이 중국 해안을 출발하여 걸프 해로 항해했고, 더 나아가 강을 따라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상류까지 항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랍 사료에도 5∼6세기경
중국 선박들이 걸프 해의 시라프 항까지 도달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6세기까지 중국과 아라비아 사이에 이루어진 해상 교역은 중국 상인들의 걸프 해 직접 진출보다는 아랍 상인들의
중국 진출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시사해 준다. 두 나라 사이의 해상 교역은 7세기 이슬람의 성립 이후 더욱 빈번해졌고, 따라서 많은 기록들이
양측의 사료에 적지 않게 등장한다.
아랍 역사학자 마수디의 대표작인 《황금초원과 보석광산》에 의하면, 7세기경
진귀한 물건을 가득 실은 중국 상선들이 아라비아 동부와 걸프 해로 들어와서 교역을 했고, 이븐 알 칼비는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 중국 시장이 형성될 정도라고 했다. 중국인들은 주로 겨울철 북동풍 몬순을 이용하여
중국 남쪽 광동 지방의 광저우를 출발하여 아라비아 해로 향했으며, 4월부터 10월 사이에 불어오는 남서계절풍을 이용하여 회항하는 항해를 반복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직접적인 내왕보다는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중간 기점으로 하는 경우가 더욱 경제적이고 실질적이었다. 아랍--페르시아 상인들도 처음에는 직접 중국까지 가기보다는 인도
말라바르 해안의 케랄라와 스리랑카, 말라카와 수마트라 해안, 좀
더 북상해서는 베트남 남부의 참파를 근거지로 하여 중간 교역의 이득을 챙겼다. 8세기 이후부터 항해술과
대양 횡단항로에 대한 정보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광주까지 직접 내왕하는 교역도 점차 증가하였다.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 머물던 중국 동남부 해안은 한반도의 지척에
있다. 오랜 항해 끝에 중국에 자리 잡은 그들이 또 다른 황금시장인 신라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랍 사료에 보이는 신라에 대한 무수한 기록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슬람이 중국에 소개된 최초의 시점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공식적인
최초의 접촉은 《구당서》 〈서역전〉에 근거하여 아랍 국가가 중국에 사절단을 보낸 당 영휘 2년, 즉 651년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해에 대식왕이 당에 최초로 사절을
보내, 대식 왕조가 34년간 세 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음을
알리다.”
651년 아랍 사절의 중국 파견이 양국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공식
접촉이지만, 당시 빈번했던 통상 관계나 해로 및 육로의 개척으로 훨씬 이전부터 많은 수의 아랍 인들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중국을 내왕했고, 따라서 이슬람의 실체가 651년 이전에 이미 중국인에게 알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없다. 그것은
중국의 구전 속에 잘 남아있다. 중국 무슬림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구전들의 기록은 6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전승 중에서 중국 무슬림들의 절대다수가
받아들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숙부이자 카디시아 전투의 사령관인 사드 빈 아비
와카스에 의해 이슬람이 중국에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명말 청초의 무슬림 학자 유지가 1725년 집필한 《지성실록연보》에 근거한 와카스 장군의 중국 정착설은 그 뒤 많은 중국 학자와 서구 학자 들에
의해 인용되면서 보편화되었다. 유지에 따르면, 와카스는 611년과 632년 두 차례에 걸쳐 세 사람의 사절과 함께 중국에
도착하였고, 이슬람 전도를 한 뒤 광동에서 죽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외숙부 사드 빈 아비 와카스에 관한 이슬람 역사 기록은 그의 중국 방문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그의 시신은 광동이 아닌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에 안치되어 있다.
그럼에도 광동의 회성사 모스크는 와카스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주장되며, 후대에
중건된 근교의 묘비석에는 와카스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물론 아랍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공식 접촉
시점인 651년 이전에 두 문화권 사이에 빈번한 교류가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이미 이슬람 이전부터 아랍과 중국 간에 원거리 무역이 행해지고 있었고,
7세기 초에는 상당한 교류 관계가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예언자 무함마드에게도
잘 알려진 것 같은데, 그의 하디스에는 “모든 무슬림의 의무인
지식 탐구를 위해 필요하다면 중국에까지 가라.”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보면 중국과 긴밀한 교류와 접촉관계에 있었던 한국인들이 이슬람이나
아랍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에는 사신, 유학생, 구법승들뿐
아니라 고구려 유민 출신이나 일반 신라인들도 곳곳에 산재해서 살고 있었다. 일본 승려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등주 법화원에서의 법회 참가자 250명이 모두 신라인이었고, 모든
의식이 신라어와 신라 풍속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헌덕왕 8년에는 “흉년으로 인하여 기근이 심하여 당의 절동 지방으로 건너가
식량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보인다. 중국과 해상 교역이 성하던 산동반도에서 회하 입구에 이르는 해안 지대는 물론 황해 및
인도차이나 해상에서도 신라인의 세력이 압도적이었다. 더욱이 중국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도 신라인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 학자 나와 도시사다는 멀리 돈황 지방에도 신라인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당에 정착했던 고구려 유민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에 당나라 전역에는 이미 많은 수의 아랍 무슬림들이 집단 정착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접촉한 한국인들이
아랍 문화나 이슬람이란 종교를 접하고 이해했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무엇보다 한국과 아랍 세계의 교류사뿐만 아니라 동서 교섭사의 발달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탈라스 전쟁의 주인공
고선지 장군의 활동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 장군 휘하의 당군에
상당수의 고구려 출신 병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중국이 아랍군대에 패배하면서 1만명에서 1만 5천명
정도의 중국 군인들이 포로로 바그다드로 압송되어갔다니 그 속에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섞여 있었음도 분명해 보인다.
한때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지방의 호포푸를 중심으로 탈라스 전쟁 때 끌려왔던 한국인 후예들이 살고 있다는 전승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보다 체계적인 인류학적인 연구로 이를 규명해보는 직업도 필요해 보인다.
2. 아랍기록으로 본 한국 아랍의 경제교류와 역사적
접촉 사실
주로
육로를 이용하던 아시아의 동서 교류는 8세기부터는 항해술의 발달로 중국 동남부 해안과 한반도 간의 해상루트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아랍 사료에 기록이 빈번히 등장하고, 구체적인
교류의 흔적이 감지되는 시기와도 맞아떨어진다. 한반도를 기록한 최초의 아랍어 사료는 845년경에 편찬된 아랍 지리서 『왕국과 도로 총람』이다. 이 책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금이 많이 나는 신라를 동경하여 한반도로 건너가 영구 정착했다. 이러한
자료가 단편적이며 빈도가 낮다면 우연의 일치이거나 신빙성 없는 이야기로 돌려 버릴 수도 있겠으나, 9~15세기
사이에 이슬람 학자들 열여덟 명이 쓴 20여 권의 책에서 아랍인과 한국인들의 빈번한 접촉을 다루고 있다. 더욱이 무슬림들의 한반도 진출과 신라의 위치, 자연환경, 산물 등에 관한 기록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아랍어 기록들을 종합하면
무슬림의 한반도 진출과 정착은 적어도 9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들 중에는 이라크 인이나 알라위 그룹의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대부분은
한반도의 뛰어난 환경적·사회적 조건에 매료되어 귀환하지 않고 영구 정착을 통해 한국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특히 9세기 중엽 아부 자이드, 슐레이만 알타지르 같은 아랍 여행자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876년에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중국 동남부 해안 지대에서만 10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 수가 다소 과장되었다
해도 당시 그곳에 정착해 있던 외국인 절대 다수가 아랍 무슬림 상인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무슬림들의 수적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황소의 난 이후 외국인에 대한 집단 학살과 외국 문화 배척 기운은 그곳의 아랍무슬림 상인 세력에게도 치명적인 위기였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중국 관습을 받아들여 중국내 이슬람 공동체의 선조가 되었다, 이들이 오늘날 중국 회족의 조상들이다. 아랍 무슬림들 일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까운 거리에 있고 이미 오래전부터 뱃길로 오가면서 교역을 하던
신라로 왔을 것이다. 그들중 일부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 일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처용이 등장하는 880년경은 바로 중국 동남부 해안가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시기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당시 신라는 아랍 해상 세력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나라로 비춰졌으며, 신라로 향하는 항로는 매우 친숙한 길이었다는 사실이다.
3. 고려시대 조선 초 한반도의 이슬람 문화
한국의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아랍 무슬림의 한반도 진출은 고려 현종 15년인 1024년이라는 데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고려사》에는 이와
관련한 기록들이 계속 나타난다.
“9월에
대식국의 열라자 등 백 명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고려사》 현종
15년 9월
“대식만의 하선, 라자 등 백 명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고려사》 현종 16년 9월
“11년
병인에 대식국의 객상 보나합 등이 와서 수은, 용치, 점성향, 몰약, 소목 등을 바치니,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객관을 마련하고 그들을 후대하도록 예우했다. 그들이 돌아갈 때 왕은 금백을 하사했다”.《고려사》 정종 6년
대식은 일반적으로 당·송 대에 걸쳐 중국에서 아라비아를 지칭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된 용어이다. 한국문헌에 보이는 대식 상인들의 이름만 보더라도 그들이 무슬림이었던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Raza, Razi, Hasan, Abu Nahab 등은 이슬람권에서 대중적인
무슬림 이름들이다.
또한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대식 상인들은 무역을 주목적으로 일시에 100명
이상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의 형태로 방한하였다. 이는 그들이 이미 한반도에 관한 정보 탐지
단계를 지나 고려와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역 관계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무슬림들의 한반도
진출은 공식 기록이 보이는 1024년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해상 항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상당한 사전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세기 중엽 몽골 제국의 등장으로 육상 실크로드라는 매력적인 문화
전파로가 다시 활성화된다. 칭기즈 칸의 몽골은 복속된 주변 민족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재앙이었지만, 인류 문명의 전파와 과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놀라운 자극의 계기였다. 이슬람
과학과 학문, 우수한 이슬람문명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몽골제국은 이를 주변 국가에 퍼트리는 역할을
했다. 몽골을 통해 받아들인 선진 학문과 과학 기술은 조선 초기까지 맹위를 떨쳤다. 이슬람 역법을 빌려 우리식 음력을 창안하고, 수많은 과학기기의 발명과
정비에도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 과학이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세종이 일군 학문과 과학의 르네상스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슬람 과학의 영향이었다는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고려말 한국의 무슬림들은 멀리 중국 남부에 까지 국제교역을 하면서 높은 사회적 신분을 유지해 갔다. 라마단이란 고랴 무슬림이 14세기 중국 광저우 지방에서 사망한 후
그곳 이슬람묘지에 묻혔다는 비문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이미 고려 사회에 국제 교역에 종사했던
상당수의 무슬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미 고려 초부터 내왕하기 시작하여 고려말 조선초까지
한반도에 정착해 살면서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5세기 중반에 들어서기 전에 이슬람 문화의 흔적은 점차 희미해졌다. 1427년 세종의 외국 문화 배척 칙령으로 급격한 동화가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무슬림들의 무리가
의관이 달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 백성이 아니라고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한다. 이미 우리나라
백성이 되었으므로 우리식 의관을 좇아야만 차이가 없어져 자연히 혼인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무슬림들이
대조회 때 송축하는 예도 폐지함이 마땅하다.”라고 하니 왕이 다 그리하라 하시다. 《세종실록》, 9년 4월조
국가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신유교주의가 강조되면서, 세계관의 초점은
온통 중국에 맞춰졌다. 이즈음 이슬람권을 평정하고 세계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른 오스만 제국 및 그들과
투쟁하고 경쟁하면서 힘을 키워 가던 유럽의 변화를 읽을 수가 없었다. 글로벌 마인드가 무뎌지면서 세계의
흐름을 놓친 것은 후일 참담한 결과로 나타난다.
4. 근대적 접촉 : 한-사우디 경제교류와 새로운 시대의 협력
오랜 단절 끝에 우리가 다시 이슬람 세계를 만난 시점은 1970년대
초였다. 이미 우리 산업 구조가 거의 완전한 석유 에너지 체제로 바뀌고 난 후이다. 지금도 원유의 80퍼센트 정도를 아랍이나 무슬림 국가에서 수입하는
실정이다. 석유만인가. 넘치는 오일 달러 덕택으로 중동 건설
시장은 한국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2∼3년간
현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아랍을 보고 이슬람 문화를 익혔다.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사막에 고속도로를
깔고, 현대식 빌딩을 세워 황량한 사막의 신기루를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 대우, 동아 같은
굵직한 건설 회사들이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 도약한 발판도 아랍-이슬람 세계였다. 그 결과 100억달러 수출과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라는 장밋빛 꿈이 1978년 말에 달성될
수 있었다. 아랍-이슬람 시장은 우리 경제 발전에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고, 지금도 해외 건설, 플랜트 수주의 약 70퍼센트 이상을 의존하고 있다. 무슬림 지역 전역에서 한국 제품들은
가전, IT, 자동차 부문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한류 열풍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폭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아랍세계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나아가
아랍은 낭만과 환상 속에 아득한 먼 지역이다. 아라비안나이트를 통해 접한 표피적 문화의 편견 때문이다. 지구상의 어느 민족이 지금 팔레스타인 인들이 처한 현실에서 저항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무장해제당하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조국의 미래는커녕 당장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암울하고 극단적인 핍박과
질곡 속에서 그들의 저항은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국제법상 인정된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고 찢긴 삶의 터전을
가꾸기 위한 생존 투쟁인 셈이다. 이제 아랍세계를 테러라는 극단적 폭력의 창으로만 보지 말고, 더욱이 서구언론이 만들어 내는 과장과 적의감으로만 보지말고 깊은 역사성과 우리와의 문화적 교류를 고려하면서
우리 눈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21세기 누구보다 든든한 협력적 동반자로 거듭나기를 고대한다.
참고문헌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문화,
2012, 청아
이희수, 이희수의 이슬람: 9.11
테러 20년 급변하는 이슬람 세계, 2021, 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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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ullah | 2025.11.21 | 0 | 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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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건설, 섬성전자 등 참여한 융복합 프로젝트 설명 정책금융기관 등 투자자와 연계도 모색
abdul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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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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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ullah | 2025.11.12 | 0 | 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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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융복합 K-City 플랫폼 협력방안 설명회’ 대우건설·삼성전자·CJ올리브네트웍스 등 참석 한국형 도시개발진출 협력 논의
abdul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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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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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ullah | 2025.11.12 | 0 | 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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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약ㆍ 바이오ㆍ건강기능 산업 전시회 2025.08.26 - 20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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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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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ullah | 2025.08.23 | 0 | 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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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산의 중동 수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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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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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ullah | 2025.07.29 | 0 | 1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