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ical Research Project

Knowing the past and Preparing for the Future

Road to Arabia 1. 6세기 아라비아인 한반도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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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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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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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라비아인 한반도에 오다
아라비아는 사막, 초원이라는 뜻. 아시아 3대 반도(인도네시아, 인도, 아라비아)중 하나로, 서남아시아에 위치하며 홍해와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으로 둘러싸인 반도 전체(북쪽 경계는 불명확함)을 일컫는 지역이다. (라이프 성경 사전)
아라비아 상인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던 아라비아와 서아시아(파키스탄에서 서쪽으로
지중해 해안에 이르기까지의 아시아 서부 지역) 상인으로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북
부에 걸쳐 무역활동을 하던 이슬람 상인을 뜻한다. (어린이 백과사전)
아라비아 반도에 살았던 아랍인들은 아라비아 사막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며 메카, 메디나 등을 오가며 대상무역을 하였다.
이들 아라비아 민족은 이슬람이 창시되기 이전에는 원시 샤머니즘과 다신교를 믿었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아라비아의 섬을 의미하는 “자지라 아라비아(Al-Jazila al
Arabiyah)라고 한다. 아라비아에는 아랍인들이 최초에 거주한 것은 아니며 다른 많은
민족이 포함됐던 점은 분명하다.
유라시아 대륙과 동서를 연결하는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도 아라비아를 비켜갔다.
(이슬람 환상세계, 가쓰라 노리오)
아라비아는 사람이 살수 없는 사막 땅 이었는데 낙타를 사육하며 유목민 생활로 살기 위
해 페르시아와 북아프리카를 횡단하며 국제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아랍문화사, 전완경)
BC 1세기경 사막속의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는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교역의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서쪽의 로마 제국과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서 태어난 완충 국가였으나, 팔미라는 로마로 흡수되었다
로마와 페르시아 상인들은 육상 교역의 위험으로 아라비아 반도를 통한 해상 교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여, 메카(Makkah)가 무역 도시로 성장하였다. 메카는 고대부터 여러 민족의 상인들과 수많은 종교들이 들어 왔다.
1세기 전후 중국이 해상 교역로로 이용한 인도양과 지중해 연안 및 메소포타미아로 통
하는 통상 도시로 발달하였다. 메카는 2세기때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책에도 마코라바
(Macoraba)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3세기경부터 아라비아가 포함된 유라시아 대륙에 큰 정세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은 위진 남북조(220-589)의 분열기로, 인도는 굽타조에 의한 통일기(320-520)로, 서
아시아는 파르티아 제국(약 BC240- AD 227)이 패망하고 페르시아 사산 왕조(226-642)로,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 대이동과 더불어 동서로 양분되는 정세 불안으로 인해 중국을 오
가는 동서 비단길 실크로드 교류가 소강 상태에 빠졌다.
파르티아 제국은 비단길 한복판에 위치하여,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 하였다.
로마 재국은 파르티아 왕조가 중국의 비단 무역을 중간에서 차단하여, 로마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상인들은 중국의 생사, 비단, 모피 등을 인도의 서해안 여러 항구를 거쳐 분할
중개무역으로 로마로 간접 수출하였다
사산 왕조도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중국과 사신 교류를 하며 로마와 중국의 동서 교역
로를 지배하며, 전쟁시에는 교역로를 봉쇄하며 번영하였다
유럽과 아시아 교역형태도 3세기 정세 변화로 육로에서 바닷길로 발전하였다.
로마 제국은 2세기 전후 파르티아와 전쟁 중에도 동방 무역을 위하여 배를 타고 홍해,
아라비아해, 인도양, 페르시아만, 말라카 해협을 항해한 내용의 기록이 있다.
항해기에는 인도양에서는 매년 6-9월 히포로스풍이라는 남동 계절풍이 불기 때문에 7월
경 이집트나 아덴 등 홍해 입구에서 출발하여 인도양을 항해하는 것이 적기이다.
벵골만은 12-2월 사이 북동 계절풍이 불고 3-5월 사이에는 서풍이 불기 때문에 이 기간
에 서항이나 항해하는 것이 적기다(에리트리해 안내기)
계절풍은 대륙과 해양의 비열 차이로 발생한다.
여름에는 대륙이 바다보다 더 가열되므로 대륙 내부 지역에서 저기압과 상승기류가 형성
되고, 이를 메우기 위해 상대적으로 바다에서 대륙 쪽으로 바람이 많이 분다.
겨울에는 대륙 내륙지역이 차가워지고 하강 기류와 고기압이 형성되어 대륙에서 해양 쪽
으로 바람이 불어나간다.
해상 무역은 계절풍을 이용하여 북동풍이 부는 12-1월에는 남서쪽으로, 반대로 남서풍이
부는 6-7월에는 북동쪽으로 항해하였다. 인도의 다우(dhou), 동남아시아 종(jong), 중국
의 정크(junk)선 등이 다녔다고 한다.
계절풍을 이용하면 안전하고 신속하게 항해할 수 있다. 항해가 순조로울 경우 홍해 입구
부터 인도 서안 무지리스까지 40일밖에 안 걸린다. 로마에서 인도(스리랑카)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상당기간 인도나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분할 무역을 하다, 3세기경부터 로마
와 중국이 직접 해상무역으로 교역을 하였다
(고대 문명 교류사, 정수일)

1). 신라(BC 57-935), 고구려(BC 37-668) 백제(BC 18-660)
4세기 전후 신라, 고구려, 백제는 해상 무역을 하였다. 고구려는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396)했고, 백제는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397), 신라는 왜국의 침입을 격퇴(407)하였다
4세기 중엽 백제는 고구려와 전쟁에서 이겨 서해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동북아시아, 동
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바닷길을 통해 해상 무역로를 개척하여, 후대에 아라비아 상인
이 한반도에 오게 하는 길을 열었다(문화원형 백과, 한국 콘텐츠진흥원)
중국의 저쪽 감숙(甘肅) 맞은편에 산이 많은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한다. 그곳은 금이
풍부하다. 그곳으로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빠져 영원히 정착해 버리곤 한다
(846, 이븐 쿠르다지바, “도로 및 왕국”)
7세기 패망한 사산 왕조(224-651) 폐르시아 왕자 와비단이 651년 신라(新羅)에 와서 20
여년간 살다가 왕정 복구를 위해 이라크 바그다드로 귀환했다.
(“아랍 사서”, 1230년 발행)
신라는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7년 전쟁을 치르고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신라는 만주 벌판을 한반도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는 비판도 있다. 민족이란 아주 근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신라 성덕왕(702-737)시대 경주 인구는 20만 또는 70만이라는 세계적인 도시였다. 신라는 중국 당나라(618-907) 연안에 신라방을 만들어 동중국해와 황해, 남해 등 국제교역망과 교류를 하는 세계화된 나라였다. 3면이 바다이고 국제무역항 울산항이 있는 신라는 특히 백제나 고구려와는 달리 귀족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해상 무역을 하여 상업이 발달하였다
신라 장보고(790?-846)에 의해 도입된 청자 제조 기술은 고려 시대에 독창적인 기법이
가미가 되어 중국에서 최고의 명품으로 대접을 받았다.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 이라는 해군 및 무역기지를 설치하여 당나라에 가는 일본인들이 장보고(張保皐)가 보유한 수백 척의 배를 이용하여 해상무역이 더욱 발전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삼국사기와 그리고 통일신라(AD 676-918)를 이슬람 세계에 처음 소개한 “중국과 인도 소식” 여행기(851, 술레이만)에도 있다.
아라비아인(Arabian, An Arab, 아랍인)은 초원(위구르, 몽골 고원)과 사막(우루무치, 돈황), 바닷길(인도양 항로)로, 인도와 베트남, 중국을 경유하여 또는 직접 한반도에 와서 교역의 길을 개척하였다. (지리학자 Al-Idrisi, “천애 횡단 갈망자의 산책”)
삼국유사는 처용의 생김새가 눈이 쑥 들어가고 코가 높다고 하여 아랍계 사람일 가능성
을 암시하여 처용설화에 나오는 처용은 서역인(아라비아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헌강왕(875-886)은 개운포(오늘날의 울산)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었다. 동해 용왕
의 장난으로 알고 “절을 지어주라”고 하니 안개가 걷혔다. 용왕의 아들 중 하나가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 벼슬을 받고 미인에게 장가를 들게 하였는데 그가 處容(처용)이다.
그의 아내가 疫神(역신)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보고 태연히 노래를 불렀다.
그에 감복한 역신은 “당신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說話(설화) 이다.
7-9세기 울산 부근 항구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으므로 이상한 생김새를 한
처용에 아라비아인이라는 추정도 있다(한국사, 하일식)
신라 원성왕(785-798)의 무덤으로 짐작되는 괘릉 무덤을 지키는 석상에 서역인 상이 있
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는 일찍이 서역인이 왕래하였을 것이다. (학생백과 에듀넷)
통일 신라는 200년간 외세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7세기말 신라의 대외무역은 발해, 당나라, 일본과 이루어졌다. 당으로 가는 바닷길은 전라도 영암에서 상해로, 경기도 남양에서 산동반도로 가는 두 길이 있었고, 울산 항은 국제무역항으로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5세기부터 울산항으로 신라를 찾아온 아라비아 상인들은 신라를 “전염병이 없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지고, 사람들이 순박하고, 자연이 아름답다”, “불멸의 땅으로 한번쯤은 가
보고 싶은 이상향의 국가”로 소개하여, 이때부터 아라비아 상인들이 신라를 Al-Shila,
Kaoli라고 불러 지금 한국이 Korea로 되었다.
(이슬람학자 Rashid Al-Din, 1247-1318, 세계통사, 집시 Al-Tawarikh”)

2). 고려(918-1392)
고려를 새운 왕건의 선조들은 바다 상인이었다. 고려의 출범은 처음부터 바다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고려는 해로와 항구가 잘 정비되어 있어 대규모 물자이
동은 주로 바다와 강을 통해 이루어 졌다. 고려 조정은 모두 13개의 조창(세금을
거둔 쌀 등 물자를 보관하고, 이를 중앙에 보내기 위해 설치한 창고 또는 그 일
을 관장하는 기관)을 운영하였는데 덕흥창과 흥원창은 강 포구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바닷가에 있었다. 중국 송나라 곳곳에 고려관이 설치되었다.
해상무역으로 재력과 부를 쌓은 인물로는 신라 장보고를 비롯, 진주의 왕봉규, 개성(송악)의 작제건(왕건의 조부)등이 있고, 이들은 고려 건국의 중심 세력이다(우리 역사, 한영우)
개성에는 많은 국제 무역상들이 찾아와 교역이 번성한 도시이며, 그래서 개성 사람들을
장사를 잘한다고 하여 “장사를 잘하는 사람을 개성 상인”이라 한다.
신라에 이어 고려도 개방적인 나라로 대외무역이 활발했다. 왕건은 해상무역을 하던 개
성 상인 후예(後裔)이다. 고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금속활자와 고려 인삼이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보급 되었다.
고려사에는 고려 현종 10년 거란과 27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성기였다. 현종 15년 9월
(1024)에 이슬람 상인 100명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많아
예배처도 있었으며, 이들은 국가행사 팔관회에도 참가 하였다.
1025년에 100명, 1047년에 100명이 입국, 방물을 바쳤는데 이중에는 귀화인도 많다.
1040년에는 대식국의 상인 보나개(保那蓋)등이 와서 수은, 용치, 점성향, 몰약, 대소목
등 아라비아 산물을 바쳤다. 정종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돌아갈 때 많은 금과 비
단을 주었다. 1047년 이후는 아라비아 상인의 왕래기록이 없는데, 아마 먼 항해에 비해
이익이 적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신라 말 9세기에서 고려 초 10세기에는 벽란도 일대에 4만에서 7만에 이르는 외국인이
모여 살았는데 대부분은 이슬람 상인이었다.
이슬람 상인들과 가장 활발한 교류를 한 시기는 11세기 고려이다.
11세기는 고려 최고의 전성기로 국제무역항 벽란도를 통해 고려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
고, 벽란도에는 송나라, 일본, 아라비아 상인들의 왕래가 많았다.
당나라때부터 광주(廣州)를 중심으로 무역으로 기반을 다졌던 아라비아 상인들은 송(宋)
대에도 고려 벽란도에 많이 왔다. 특히 원나라때는 강남 한족과 화북지방 한족이 가장
끝까지 저항을 하여 하층 계급으로 차별을 하여, 남 중국 한족들과 아라비아인들이 고려
에 많이 귀화를 하였다
Abbas 왕조(751-1258)를 함락(1258)한 칭기즈칸이 당시 우수한 이슬람 학자를 강제로
데리고 와서 몽골 정부 고위직에 중용하였고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세운 원나
라(1271-1368)는 아라비아인 100만명을 정부 관리로 채용하였다.
고려와 원나라는 결혼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역대 북방민족이 세운 정복 왕조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중국을 정복하였지만, 중국
문화에 점령당하였다. 원나라도 한자 대신 “파스파 문자” 창제와 유고를 배척, 라마 불교
숭상, 아라비아인에게 내정과 조세를 담당하게 하여 97년간 중국을 통치하였지만, 몽골
문화를 정착시키지는 못하였다.
충렬왕(1274-1308)과 결혼을 하기 위해 원 세조의 딸 제국 공주가 고려에 올 때
시종(Attendant)으로 한국에 온 아라비아인 중에 왕으로부터 장순용 이라는 이름
을 하사(1275)받은 분이 덕수 장씨 시조이다. 장순용은 공주를 모시고 온 원나라
고위인사로 독자적인 외교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고려는 장순용의 도움이 필요하
여 왕이 특별히 성씨를 하사하였고, 장순용도 종2품 僉議參理(첨의참리)로 고려에
많은 도움을 주며 귀화한 최초의 아라비아인이다. (고려사)
충렬왕(1274-1308)때 고려에 귀화한 아라비아인 민보(閔甫)는 대장군을 제수 받
았고, 충렬왕의 사신으로 네 차례나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충선왕 때는 平壤(평양)
府尹(부윤)이 되었다. (국경을 넘은 한국사, 안형환)
칭기즈칸은 몽골제국 건설에 중앙 아시아 일대 대상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몽골이 동서 교역로를 안정하게 지켜줄 것으로 알고, 자금과 적에 대한 정보도
제공했다. 몽골을 도운 중앙 아시아 일대 상인들 중에는 고구려 후손도 많았다.
고려 가요 쌍화점에 이슬람 상인이 등장한다. “쌍화” 란 투르크계 만두의 일종인데 “쌍화
점(만두 가게)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더니 무슬림 주인 아비가 고려 여인의 손목을 잡으
면서 은밀하게 유혹하는“ 내용이다. 쌍화점은 고려에 사는 아라비아인들이 대해 만두가
게를 열고 살아가도록 한 우리 민족의 개방성과 대외 지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라비아인의 한반도 귀화는 원나라의 “아라비아인 등용 개방정책”에 영향이 크다.
원(元)나라(1271-1368)를 세운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할아버지 칭기즈칸이
Abbas 함락 이후 데려온 아라비아 학자들의 우수성을 알고, 그리고 동생인 “훌라구” 가
통치한 “일 한국(汗國)”에서 불러온 이슬람 기술자들이 1백키로 넘는 돌을 발사하는 회
회포(回回砲)를 제작하여 송나라 후기 南宋(남송)을 통일하여, 각별히 우대하였다.
원나라는 20년간 이슬람 상인 아흐마드를 재무장관에, 국제적 네트워크를 가진 이슬람
경제단체 오르톡(Ortag)들에게 이권(利權)을 주고, 초원과, 사막 길, 바닷길 네트워크를
개척하여, 유라시아 세계에 편입되는 통치 지배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원 나라는 칭기즈칸의 고문 야율초재(1190-1244)의 자문을 받아, 국가 통치를 4개의 신
분으로 나누어, 최고 신분은 몽골인, 제 2신분은 색목인(여러 인종이 섞여 복잡하다는
뜻, 이슬람 문화권, 서역계 종족), 제 3신분은 한인(금의 지배하에 있던 화복의 중국인,
말단 관직), 제 4신분은 최후 정복된 강남의 南宋(남송) 한족(관직을 주지 않았다)이다.
원나라 1억 2000만 인구에, 지배층 몽골인이 100만명, 제2 지배층 색목인, 주로 무슬림 상인이 100만명이었다. 원나라는 무슬림 지식인을 내정과 세무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때 아라비아인들이 “살기 좋은 나라”로 알려진 신라 땅 고려에 많이 왔다. 수도 개성
에 아라비아 집단 촌이 있었고 이슬람 사원 예궁(禮宮)도 있었다.
왜구를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약이 원나라에서 들어온 항구가 지금의 북한땅
벽란도(碧瀾渡)이다.
6세기에서 12세기까지 서역은 돌궐, 거란, 여진, 몽골, 소그드, 티베트, 위구르와 유라시
아 서부정복 왕조들의 각축(角逐)으로 아라비아 상인들은 바닷길을 많이 이용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바닷길 경유 국가인 인도와 스리랑카, 베트남, 중국 무역항인 광동성
광주(廣州), 복건성 천주(泉州), 절강성 영파(寧波) 등에 많이 살았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처용”이나, 고려 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 아비는 대식국, 사라센 제국의 아라비아 상인이다. (고대문명교류사, 정수일).
통일신라와 발해(698-926)가 병존한 7세기부터, 아라비아 상인들이 한반도에 왕
래하며, 수은과 향료, 의약품, 산호 등을 팔고, 고려 비단이나 금, 청자 등을 사 갔다.
우리나라는 총 5582개의 성씨(Family Name)가 있다(통계청 발표 2016.9.7)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시대에 왕족과 고위층은 성씨가 있었으나, 일반인은 성씨(姓氏)가 없었다. 성씨 족보(Clan Genealogy)는 고려를 건국(918년)한 왕건이 토성분정(土姓分定, 지방세력 통치를 위해 땅과 성씨를 준 정책)을 하며 시작 되었다.
한반도는 고려의 개방정책으로 다양한 이민족의 귀화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풍습,
여러 전통을 함께하여 단일 민족으로 유지된 것은 외래 문화를 흡수하고 융화한
문화적 동화의 힘 때문이다. (고려사의 재 발견, 박종기)
우리는 이미 검증된 용광로 민족이다.
인류역사는 좀 더 나은 환경과 일자리를 찾아 국제적으로 이동한 이주민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주민을 받는 나라는 미국, 사우디 아라비아, 독일이다. (세계의 창, 최희남 세계은행 이사)
국내 거주 외국인 비율은 고려 때나 지금이나 평균 2.6%라고 한다. 고려 첫 백 년 동안 17만명이 귀화(歸化)했다. 그 당시 고려 인구 200만 중 거의 8%가 귀화세력 (송사(宋史)이었다. 고려의 국력이 강하고 문화가 앞서니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된 것이다.
우리 성씨 가운데 절반이 넘는 인구가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며 외국에서 귀화한 성씨이다. 우리 민족은 다민족 통합에 있어 세계적 모범사례다. 즉 역사적 성공 경험을 가진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이고 그 핵심은 문화적 자신감이다.
(세계 속의 한국, 정수일)

3) 조선(1392-1910)
조선(1392-1910)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처럼 왕래가 많지 않았으나, 귀화의 기록
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인들의 무역활동은 계속되었다.
고려에 이어, 조선에도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성(性)씨와 관직을 주고 전통문화를
지키며 살도록 집을 주는 특전도 베풀었다(유라시아 고려인, 김호준)
신라, 고려, 조선에 온 아라비아 상인들과 귀화인들은 그 당시 대단한 권력과 재력이 있었다. 13세기 조선은 원나라에서 온 아라비아 과학자들의 과학기술과 천문 역법을 발전시켜 이슬람과 서방 과학, 중국 전통과학을 모아, 세종 시대에는 창조적인 과학 문화가 발전 하였다.
아라비아 상인은 좁게는 아라비아 반도의 상인을, 넓게는 비단길 경유 국가 중앙 아시아
와 서아시아 전체 상인들을 가리킨다. 서아시아는 파키스탄에서 서쪽으로 지중해 해안에
이르기까지 지역 통칭으로, 파키스탄을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
논, 터키,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스라엘 등이다. (두산백과)
이는 서아시아가 사라센 제국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사라센 제국을 “大食
國”이라고 했다. 고려에서는 이슬람인을 “回回인” 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슬람인 중
앙 아시아 위구르도 포함하는 말이다
한반도에 온 아라비아 상인들은 종족과는 관계가 없이,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는 아라
비아 반도와 서아시아 지역에서 온 무슬림들이다
7세기 모하메드가 “무슬림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식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하여, 아라
비아 상인들은 육로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로, 바닷길로 한반도까지 왔다.
이 시기 아라비아 상인들은 고대 인도양에서 항해하던 역풍에서도 앞으로 전진하는 3각
돛을 단 목조선 다우선(Dhow)을 이용하여 바그다드 외항 바스라(Basrah), 페르시아만의
시라즈(Shiraz)에서 동아프리카, 인도, 동남 아시아, 당에 이르는 정기 범선로(帆船路)를
개발했다. 그들은 순풍을 타고 아라비아 해를 통해 약 120일에 걸쳐 광주에 도착했다. 9
세기 중국 양주(揚州)에 수천 명의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이 거주했고, 신라와도 왕래
를 했다.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중국 산동 반도에 산재했던 신라방은 국제적인 Diaspora(디아스포라)의 한 형태이고, 쌍
화점의 도시 개성에서 고려 여인들이 아라비아인들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었고, 조선의
궁중 연회에서 코란을 읽었다는 것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국제화, 개방정책을 설명
하는 사례이다. 무슬림 기술자들은 보석 채취와 광산업에도 종사했다.
세종대왕 즉위식에 이슬람 지도자가 참석하여 코란을 암송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
원나라가 이슬람 학자들을 대거 초빙하여 천문대, 의학원 등을 설립하여, 이러한 기술이
조선에 많이 유입되었다.
태종 때 무슬림“도로”가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기를 원해 태종이 집을 주고 살게 했다.
“도로”는 조선왕조실록에 회회 사문으로 기록이 있는데 사문은 성직자 계층을 말한다.
15 세기 초 궁중 의례에 사문들이 참석하여 그들의 소유 의식으로 축하를 했고, 코란을
낭송하며 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빌었다(조선왕조 실록)
신라의 최치원(857-사망 미상)을 관리로 등용한 수와 당의 개방정책과 북방 민족이 건국
한 여진족의 송나라(960-1279), 몽골족의 원나라(1271-1368), 만주족의 청나라(1636-
1912년)와 한반도는 교류가 많았다. 조선이 명. 청 정권 교체기에 정세 판단을 잘못하여
병자호란(1936-1937)이라는 혹독한 전쟁 피해를 입었으나, 중국과 한반도는 우호적인
시기가 많았다

4) 한국 전쟁
6.25 전쟁 참전국가는 총 16개국이다.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디오피아,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터키 등은 유엔이 요구한 최소규모 1개 대대병력 약 1200명 이상을 파견하였다. 참전 연합군은 미국을 제외하고 3만9천여명에 이르며, 미국을 포함하면 34만 1천여명이다.
이중에 아라비아 국가 이디오피아(1200명)와 터키(4500명) 병사들이 참전하여 한국인이 이슬람을 알게 되었고, 1970년 9월 한국정부는 이슬람 재단에 사원 건립용 부지 1500평을 주었다.
2016년 무슬림 관광객은 98만 6000명, 주로 타이얍(Tayyab)세대로 전체 관광객 39%가 25-34세라 한다. 해산물은 “할랄”(halal) 음식이라 수산시장을 많이 간다 한다
한반도에 살고있는 아라비아 후손은 얼마일까?.
남북한에 거주 아라비아 상인 후손은 1000만명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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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ullah | 2026.02.19 | Votes 0 | Views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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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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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유민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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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살만 왕세자, 결혼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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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의 사우디-카타르 순방…주요 경제 성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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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 한국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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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Seoul to Saudi: How Korean and Japanese stores are influencing Saudi tas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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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 해외 정상 최초로, 사우디 最古의 ‘킹 사우드 대학교’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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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text of joint statement adopted by leaders of Korea, Saudi Arabia Posted : 2023-10-24 16:59
abdullah | 2024.03.25 | Votes 0 | Views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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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text of joint statement adopted by leaders of Korea, Saudi Arabia: 2023-10-24
abdullah | 2024.03.22 | Votes 0 | Views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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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와 네덜란드 왕국 정부 간 공동성명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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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포커스] 엑스포 ‘징비록’ 경쟁자의 ‘반칙’과 회원국의 ‘배신’만 탓해서야 사우디가 이긴 진짜 이유 그걸 찾아야 재도전도 가능 이인열 기자 입력 2023.12.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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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 사우디와 MOU…“사업기회 발굴 공동 협업팀 구성” 입력 2023-12-13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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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차관 “중동 순방 성과 107조…수주사업 차질 없이 이행” 입력 2023-12-13 14:04
abdullah | 2023.12.14 | Votes 0 | Views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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